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매튜 B. 리지웨이 (문단 편집) == 평가 == 6.25 전쟁에 투입되기 직전에도 뛰어난 인재로 평가받고 있었고, [[1.4 후퇴]] 직후 사기나 전략면에서 개막장 하이웨이를 달리고 있었던 유엔군을 빠른 시간 내에 재정비하여 곧바로 38선까지 치고 올라가는 등 전세를 역전시킨 공로는 많은 전쟁사 연구가들에게 크게 호평받고 있는 부분이다. 또한 그는 [[발터 모델|직접 정찰기에 타 저고도 비행을 하면서 적진을 살피거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최전선에 나가서 부하들을 독려하고 지휘하는 모습을 보여]] 많은 장병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그가 한국 전선에 있을 때의 사진들을 보면 군복의 가슴 부분에 수류탄 한두 개가 꼭 달려 있는데, 그가 말하길 자신도 군인이므로 만약 적군의 기습을 받게 된다면 자신의 몸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리지웨이는 아주 강직하고 용맹한 군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하나 받기도 어려운 미육군 [[수훈십자장]] 2회 수훈과 무훈과 뛰어난 전공을 세워야 수여되는 은성무공훈장 2회 수훈한 점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그가 장병들에게 보낸 글 속에서 그가 [[예방전쟁|어떤 마음]]으로 6.25 전쟁에 임했는지를 뚜렷하게 나타낸 문장이 있는데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 '''핵심적 문제는 서방문명이 공산주의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가, 아니면 포로들을 사살하고, 시민들을 노예화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지배층이,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神聖視(신성시)하는 정부를 무너뜨릴 것인가이다. 우리의 동맹국인 한국의 자유뿐 아니라 우리의 자유, 우리의 자주독립과 생존을 위해 우리는 싸우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공산주의와 개인의 자유 중 兩者擇一(양자택일)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으나 동시에 最善(최선)의 기회를 부여받았다. 군인이란 직업의 명예를 드높여, 우리를 믿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에게 최선의 의무를 다할 기회가 왔다.''' 프랑스군이 고전하고 있었던 베트남에 미군을 투입시키려고 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말린 일화에 대해 역사가들은 리지웨이가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한 덕에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이 10년 정도 늦추어질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퇴역 [[크리]]... 또한 베트남 전쟁 당시 6.25 전쟁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제한전 상황에서 공군력의 우위는 단지 허상일 뿐이라며 미 공군의 북베트남 폭격을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해군력과 공군력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던 미군이 '''사실상 제해권과 제공권 자체가 없었던''' 인구빨 중공군을 한반도 북부에서 끝내 몰아내지 못한 사실, 그리고 이후에 전개된 베트남 전쟁의 전황에서 알 수 있듯이 정확한 것이었다. 이렇게 군대 지휘나 자문에 있어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리지웨이였지만, 6.25 전쟁 참전 초기 자신의 공세적 전략에 따르지 않는 장교들을 해임하고 전부 자기 주장을 지지하는 장교들로 갈아치운 일,[* 그 덕에 패전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쫓아낸 인물들이 전임 미8군사령관이었던 워커의 부하들이었으며, 리지웨이의 상관이었던 맥아더가 워커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리지웨이가 일부러 워커의 부하들을 쫓아냈다는 의견도 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 최고사령관직에 있던 시절 자기 주위를 자기 부하들로만 꽉꽉 채워넣는 행태 때문에 다른 유럽 국가 군 사령관들의 반발을 샀던 일을 보면 그 역시도 인간으로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그래도 핵무기를 전쟁에서 쓰겠다고 위험한 소리하던 맥아더보다는..~~ 또한 그는 [[횡성 전투]] 당시 한국군 8사단이 맥없이 후퇴하면서 전멸하고 같은 전선을 형성하던 미군까지 큰 피해를 입힌 사례를 두고 "나는 [[한국인]]들의 유전자 속에 [[중국인]]에 대한 경외감이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는 내용을 자서전에 기술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국군 지휘관들이 소위 인해전술이라는 단어까지 조어해 낼 정도로 끊임없는 기동으로 화력방면에서 전술적 수적우위를 이끌어내는 중공군의 기동전술을 사대주의적 사관인 대륙의 이미지로 부풀려 내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굉장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우리 입장에서만 보면 썩 유쾌하지 않은 서술인 것은 분명하지만, 횡성전투를 비롯한 한국전쟁 초중기에는 한국군이 중공군에게 대패하여 전선 전체가 다대한 위험에 빠진 경우가 실제로 여러 번 있었기에[* 중공군은 국군이 상대적으로 약체인 것을 파악하고 공세마다 국군을 우선 공격하곤 했다.] 리지웨이의 평가는 결코 과장되거나 악의적인 것은 아니다(...).[* 물론 이는 당시 한국군 입장에선 조금 부당한 비판이다. 애초에 미군이 국군을 전혀 믿지를 않았던 데다 오죽 못 싸우면 부산까지 밀려있었느냐는 식의 무시와, 개전전 미군 군사고문단원들이 통역과 문화의 차이로 인해 본격적인 개전 전 38선을 기준으로 중소규모 국지전이 일어나던 당시의 국군 지휘관들을 완전한 멍청이들로 소개하는 문서가 파다하게 퍼져있었기 때문. 1951년의 한국군은 개전 초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각종 화력을 충실히 제공할 중장비 등은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이 때문에 UN군 지도에선 한국군 기관총 진지라고는 적혀있지만 실상은 연발로 나가는 총이니 기관총으로 취급한 자동소총 [[M1918 브라우닝]]을 두어서 다른 곳보다 화력이 떨어지는 진지가 많았다. 이 때문에 여전히 알보병대를 면치 못하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알보병대로는 당연하지만 숫적 열세를 극복하기 어렵다. 더군더나 한국군은 급하게 팽창하고 있었으므로 병력 운용의 노하우나 병력의 질 등이 중공군에 비해 나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1951년 당시에 한국군만으로 숫적 우위를 살려 기동전을 벌이는 중공군을 막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1952년 이후 리지웨이나 밴 플리트 등이 미국 정부에 줄기차게 요청한 각종 중장비와 탄약이 충분히 제공되어 한국군이 독자적이고 강력한 포병 화력을 지원할 수 있게 되고, 리지웨이와 밴 플리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한국군의 훈련도가 상승하고 우수한 장교 자원이 배출되기 시작하고부터 한국군은 중공군에 전혀 밀리지 않고 호각지세로 싸울 수 있게 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